신라 24대 진흥왕 14년(553년)에 월성 동북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는 공사를 시작했다. 공사 중에 황룡(노란색 용)이 나타나 하늘로 올라갔다는 보고를 받고 절로 고쳐 짓기로 하고, 17년간의 공사 끝에 황룡사를 완공하였다. 진평왕 6년(584년)에 새로 금당을 짓고, 선덕여왕 14년(645년)에 9층 나무탑을 지었다. 즉 93년에 걸쳐 계속 공사를 한 거대한 절이었다. 1976년부터 1983년까지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4만여점의 유물이 발굴되었고, 높이 182cm에 이르는 거대한 치미(망새 기와)가 발굴되었다. 치미의 크기로 미루어 볼 때 황룡사의 건물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황룡사의 담장 안의 규모는 동서 288m, 남북 281m로 담장 안의 면적은 80,928㎡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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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방법]
분황사, 국립 경주 박물관에서 걸어 간다.
700번 버스 : 안압지 버스 정류장 또는 분황사 버스 정류장에 내린다.
10번 버스 : 분황사 버스 정류장에 내린다.
11번 버스 : 국립 경주 박물관 버스 정류장에 내린다. 불국사에서 가는 경우이다. 850m(13분) 정도 걸어야 한다.
진흥왕(재위 540∼576년)은 7살의 어린 나이에 왕으로 즉위했다. 하지만 유능한 군주로 성장하여 많은 전쟁을 통해 나라땅을 넓혔다. 백제 성왕과 싸워 한강 유역을 확보하고, 대가야를 정복하고 고구려를 공격하여 현재 함경남도 마운령까지 점령했다. 20세가 된 해 한강 유역을 확보하고, 새로운 궁궐을 짓도록 명령할 만큼 왕권이 강화되었다. 재위 마지막 해에 화랑 제도를 만들었다. 진흥왕의 업적으로 인해 신라는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인적, 물적 기반을 확보했다. 556년 황룡사를 준공하고, 574년 황룡사의 장륙존상을 주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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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가람 배치도. 황룡사는 창건 이후 3차례에 걸쳐 가람배치에 큰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최초의 가람배치는 '남문-중문-탑-금당-강당'을 남북으로 일직선으로 배치한 1탑 1금당 방식이었으나, 최종 가람은 금당 양 옆으로 금당을 지어 1탑 3금당 방식이 되었다.
종루에는 성덕대왕 신종(에밀레 종)보다 구리가 4배나 더 들어간 큰 종이 있었다고 한다. 경덕왕 13년(754년)에 만들었다.
중앙 금당 터에 있는 장륙존상 대좌. 금당의 규모는 동서 51.7m, 남북 26.7m로 넓이는 1,384㎡이다. 금당은 그 절의 중심 건물로서, 절의 본존불(주가 되는 부처님)을 모시는 건물을 뜻한다. 진흥왕 때 장륙존상을 만들었고, 이 불상을 모시기 위하여 진평왕 때 금당을 새로 지었다. 장륙존상(丈六尊像)이란 1장 6척(약 4m 85cm 정도로 추정)이나 되는 존귀한 부처님의 상이라는 뜻이다
인도의 아쇼카왕이 황금과 철로 불상을 만들려다 실패하자, 인연이 있는 나라에서 만들도록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웠다고 한다. 이 배가 신라에 닿아 진흥왕이 그 황금과 철로 장륙존상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아쇼카왕은 B.C. 268년에 즉위한 왕으로, 진흥왕보다 무려 800여년 전의 사람이므로 허황된 전설이다. 왕과 불교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퍼뜨린 전설일 것이다.
화가 솔거가 황룡사 금당 벽에 '늙은 소나무 그림'을 그렸는데 새들이 이를 진짜 나무인 줄 착각하여 날아오다 벽에 부딪쳤다는 전설이 있다. 세월이 흘러 색이 바래자 절에서 다시 색을 입혔는데 그 후로는 새들이 날아들지 않았다고 한다. 솔거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학자들은 통일 신라 시대의 화가라고 추정하고 있다.
9층 나무탑 터. 한 변의 길이가 약 22m인 정방형으로 바닥 넓이는 약 490㎡이다.
황룡사 9층 나무탑 상상도. 선덕여왕 12년(643년) 자장스님의 건의에 따라 착공하여 3년에 걸친 공사 끝에 탑을 완공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높이가 22장(220척), 삼국유사에 의하면 높이가 225척이라고 한다. 당시의 1척이 얼마인지 대략은 추정하고 있지만 정확히 얼마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1964년 황룡사 9층탑 터에서 도굴된 사리함기를 되찾았다. 그 안에 9층탑의 높이가 새겨져 있고 이를 근거로 계산하여 80m이상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당시 신라에는 이런 거대한 규모의 목탑을 지을 자신이 없었으므로 백제의 건축가인 아비지를 초빙하여 지었다. 황룡사 탑은 1238년 몽고와의 전쟁 중 불에 타 사라졌다.
경주시는 2034년까지 4단계에 걸쳐 총 사업비 2181억원을 들여 황룡사 복원사업을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아무런 자료도 없이 복원에 나서는 것은 무모하다고 일부 사람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복원 반대론의 근거] : 황룡사와 9층탑의 모양에 대해 아무런 자료가 없다. 탑의 구조에 대해서도 아는 바 없다. 탑의 높이도 정확하지 않다. 그리고 사실상 현재로서는 그 정도 높은 나무탑을 지을 기술이 없다.
[복원 찬성론의 근거] : 경주 남산 탑골의 바위에 새겨진 9층탑의 돋을 새김(부조)이 있다. 제작시기도 황룡사 9층탑이 존재하고 있던 시기의 돋을 새김이다. 따라서 조각이 황룡사 9층탑을 모델로 삼았을 가능성이 크고, 9층탑의 모양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본 호류지의 5층탑과 탑골의 돋을 새김을 비교해 보면, 각 층의 체감비율과 탑의 상륜이 일치한다고 한다. 즉 그 시대의 탑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다. 또 중국 산시성 숴저우(朔州)시 잉쉬앤(應縣)에 지금은 사라진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의 9층 나무탑(佛宮寺 釋迦塔)이 아직까지 서 있다. 높이 67.31m이다. 1056년에 세웠다. 황룡사 탑을 만든지 400여년 뒤에 만든 탑이다. 고려시대에 어느 시인이 황룡사 탑에 들어가 보고 그 내부 구조가 잉쉬앤의 탑과 같다고 시에 적었다고 한다(KBS의 프로그램). 그렇다면 내부 구조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1991년 복원에 참조할 수 있는 비중높은 자료가 발견되었다. 북한에서 발간한 고려박물관(영문판) 유물도록에서 금동 9층탑을 발견한 것이다. 경기도 판문군 선적리 보봉산에 고려 광종(951년)때 세운 불일사라는 절이 있었다. 절은 허물어지고 절터에 5층 돌탑이 남아 있었는데 1960년 개성시로 옮기기 위해 탑을 해체했다. 이 때 탑 안에서 금동 9층탑, 금동 5층탑, 금동 3층탑, 작은 돌탑들, 불경 등이 나왔다. 이 금동 9층탑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목탑 양식을 한 금동탑으로, 높이 37cm이고, 계단, 문, 창문, 기와까지 정교하게 제작한 뛰어난 작품이다. 이 탑이 황룡사 9층탑을 모델로 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신라의 영향이 남아있던 고려초기의 작품으로 신라 목탑의 양식을 알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하겠다. (오른쪽 사진) 황룡사에 있는 상상도보다는 불일사 금동 9층탑이 훨씬 날렵하고 균형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상상도의 나무탑은 둔탁한 느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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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충적 견해] : 여태 조사, 발견된 자료로 복원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옛 터에 세울 수는 없고 별도의 장소에 복원해야 한다.
[일본의 경우] : 710년부터 784년까지 74년간 일본의 수도였던 헤이죠쿄(현재의 나라) 유적지에 있었던 왕궁 전체를 복원하고 있는 중이다. 복원의 근거 자료가 황룡사보다 더 많다고는 할 수 없다. 사실 헤이죠쿄의 왕궁의 모습에 대한 자료 역시 황룡사처럼 건물 터밖에 없다. 따라서 야쿠시지, 토다이지, 토쇼다이지 등의 건물과 출토물들을 참조로 하여 새로 만들고 있다. 엄격한 의미에서는 복원이 아니라 새로 만드는 것이다. 물론 반대도 있었지만, 전체적인 합의하에 왕궁의 터에 새로 왕궁을 짓고(복원하고) 있다.
국립 부여 문화재 연구소는 1996년부터 현재까지 남원 실상사의 나무탑 터를 발굴하고 있다. 지금까지 발굴 결과에 의하면 실상사의 나무탑은 황룡사의 나무탑보다 좀 더 큰 탑이다. 한 변의 길이가 23.2m인 정방형이다. 그리고 탑 북쪽 60m쯤에 큰 규모의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이런 거대한 나무 탑들은 우리나라에도 많았고, 중국과 일본에도 있었다. 황룡사 9층탑은 이런 거대한 탑들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큰 편에 속한다.
지금은 사라진 선비족의 국가인 북위는 뤄양(洛陽)에 영녕사(永寧寺)란 절을 짓고 거대한 나무탑을 세웠다(518년). 양현지(楊衒之)라는 사람이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라는 책에서 그 탑의 크기가 1천척(有刹, 復高十丈, 合去地一千尺. - 약 300m정도)에 이른다고 했다. 그런데 문학가들은 그 높이가 xxx.xx척이다라는 등으로 과학기술자들처럼 정확하게 기술하는 습관이 없는데다가, 과거 중국 문학자들은 크게 과장하는 습관이 있었으므로 아주 높은 탑이었다는 것 외에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1979년부터 1994년까지 영녕사 터를 발굴하였다. 발굴 결과 영녕사 탑은 가로 세로 38.2m의 정방형으로 밝혀졌다. 높이가 대략 147m정도로 추정된다. 탑은 북위가 멸망하던 해(534년)에 벼락을 맞아 불에 타 없어졌다. 피뢰침이 없었으므로 높은 탑들은 벼락을 맞는 일이 많았다. 영녕사 탑은 순수한 나무탑이 아니라 벽돌과 나무를 함께 사용한 탑이다.
문화재에 올라가지 맙시다.
중문 터. 그 뒷편이 남문 터이다.
분황사쪽으로 본 모습. 오른쪽부터 중문 터, 9층탑 터, 금당 터, 분황사이다.
분황사에서 가는 길
분황사 출입구에서 나와 담을 따라 돌아가면 분황사 정문이 있다.
분황사 정문 맞은 편에 황룡사 터가 있다. 원래 분황사의 중문은 지금 정문보다 더 남쪽에 있었다.
정문 앞에 황룡사 터 안내 표지가 있다.
분황사 정문에서 보면 앞에 황룡사 터가 보인다.
안압지, 국립 경주 박물관에서 가는 길
안압지에서 조금만 더 가면 박물관 네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이 박물관이고, 왼쪽으로 650m, 10분 정도 걸어가면 황룡사 터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온다.
길 동쪽에 걷는 길인 나무 데크길이 있다.
철길을 건넌다. 오른쪽에 황룡사 터가 보인다.
철도 건널목.
철도를 건너 뒤돌아 본 모습.
황룡사 터 안내 표지가 보인다. 오른쪽으로 간다.
멀리 문이 보인다.
길은 막혀 있는 듯 보이지만...
옆에 샛길이 열려있다. 이런 것을 '융통성'이라고 한다.
안으로 들어와서 뒤돌아 본 모습.
안으로 들어가면 황룡사 터이다. 길 양쪽 흙을 돋워 둔 곳 중 왼쪽이 금당 터, 오른쪽이 9층탑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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