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회마을은 풍산 류씨 일족이 600여년간 살아온 마을로서 조선시대의 건축물과 유교 문화가 잘 보존된 마을이다. 마을을 휘감아 도는 낙동강변에 자리잡아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다. 2010년 양동 마을과 함께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현재에도 주민이 살고 있는 마을 중앙에 있는 600여년 된 삼신당 신목을 중심으로 조선 시대의 기와집과 초가집이 잘 보전되어 있다. 하회탈과 평민들의 하회별신굿탈놀이와 양반들의 선유 줄불놀이가 전승되고 있다. 조왜7년 전쟁(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내고, 징비록을 쓴 류성룡이 태어난 곳이다. 마을 이름을 하회라고 한 것은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마을 주변을 휘돌아 흐르는 데서 유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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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료] 어른 3,000원 / 청소년(13~18) 1,500원
[여는 시간 (입장 마감 시간)] 하절기 》09:00~19:00 / 동절기 》09:00~18:00
[닫는 날] 없음
[가는 방법]
46번 버스 : 안동 버스터미널, 안동역 버스 정류장에서 시내 버스를 탄다. 하회 마을(하회 장터) 버스 정류장에 내린다. 소요시간 약 50분. [교통] [안동 버스 터미널], [안동역] 페이지 참조.
하회 마을 매표소(하회 장터)에서 셔틀 버스를 타거나(2~3분), 오솔길을 걸어 간다(약 1.2km).
1960년대 하회탈의 예술적 가치가 높아지면서 하회 마을의 관심도 높아졌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으로 시골의 주택 개량 사업에도 불구하고 하회 마을은 원형대로 보존됐다. 1999년 엘리자베스2세 영국 여왕의 하회 마을 방문으로 세계의 관심을 받았다.
안동 하회 마을 약도 [크게 보기]
하회 마을은 삼신당 신목을 중심으로 골목길이 방사형으로 뻗어 있다. 마을 중앙을 가로지르는 큰길을 중심으로 북촌과 남촌으로 나뉜다. 북촌의 양진당과 북촌댁, 남촌의 충효당과 남촌댁이 전형적인 양반집이다. 집들이 마을의 중심에 있는 삼신당 신목을 기준으로 강을 향해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집의 방향이 일정하지 않다. 양진당은 남향, 충효당은 서향, 북촌댁은 동향이다. 한국의 집들이 남향을 선호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기와집을 중심으로 주변에 초가집들이 둘러싸고 있다. 또한 마을의 중심부에는 류씨들이, 변두리에는 각성(各姓)들이 살고 있다.
하회 마을 안내판에서 왼쪽으로 간다. 하동 고택으로 가는 길이다.
가는 길 중간에 보건 진료소 옆에 넓은 공터가 있다. 시내 버스 정류장으로 이용된다. 오른쪽에 화장실이 있다.
하동 고택이다. 하회 마을의 동쪽에 있어 하동 고택이라고 부른다. 류교목이 헌종2년 1836년에 지었다. 사랑채와 안채는 기와집이나, 대문채는 초가집이다. ㅁ자형 집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이어져 있다. 하동 고택 뒷담벼락(노란색 화살표)을 따라가면 남촌댁이 나온다. 초록색 화살표를 따라가면 마을의 중심길을 따라 북촌댁, 양진당, 충효당이 나온다.
남촌댁의 집터이다. 대문은 조금 더 가야 나온다. 하회 마을의 골목길은 곧게 뻗어 있지 않고, 담장 사이로 휘어진 곳이 많다. 골목길과 집의 방향이 일치 하지 않아서 골목길을 돌아야 대문이 있는 곳이 많다.
남촌댁의 솟을대문이다. 솟을대문은 아무나 사용하지 못하고 당상관 이상만 사용할 수 있었다.
남촌댁 대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사랑채가 있다.
남촌댁 안채터. 남촌댁(염행당)은 하회 마을 남쪽을 대표하는 고택이다. 정조 21년(1797) 류기영이 건립하였다. 1954년 화재로 안채와 사랑채가 소실되고, 대문간채와 별당, 사당만 남아 있었다. 그 때 도서와 골동품이 불타 없어졌다.
최근 두어 세대 전에는 남촌댁을 중심으로 한 동남쪽에도 집이 많았었다. 이쪽 지역을 웃하회 내지 남촌이라고 불렀다. 강에서 떨어져 있어 홍수의 피해도 적었고, 농지가 인접해 있어 입지 조건이 좋았다. 남촌댁의 가세가 약화되면서 일가 세력도 더불어 약화되었다. 그 후 많은 집들이 점차 논밭으로 바뀌게 되었다.
남촌댁 대문에서 오른쪽을 보면 별당과 사당이 있다. 담장을 기와 편으로 반원 무늬로 장식하였다.
남촌댁의 별당채. 별당채를 마당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만들면서 별당을 둘러싸는 담장을 따로 만들어 독립적인 공간으로 만들었다. 손님을 맞는 공간으로서 원래는 큰 대청으로 되어 있었다. 지금의 부엌은 이후 개조된 것이다. 흙 벽면에 기와를 사용하여 석쇠 무늬 바탕에 희(囍)자와 수(壽)자를 만들었다.
남촌댁 대문을 나와서 오른쪽으로 간다. 주일재 가는 길이다.
담장 너머로 주일재가 보인다. 왼쪽에 분홍색 벽면의 영모각이 보인다. 주일재는 남촌댁과 충효당 중간쯤에 있다. 오른쪽으로 난 길은 북촌댁(마을 중앙길)으로 가는 길이다.
주일재(양오당). 골목으로 들어가 담장 중간이 끊어진 곳으로 들어서면 사랑채가 보인다. 왼쪽의 작은 담은 안채 내부가 바로 보이지 않도록 세운 차면담이다. 담장을 적절히 이용하여 안채의 부녀자를 배려하였다. 류성룡의 증손인 류만하가 충효당에서 분가할 때 지은 집이다. 그의 아들인 류후장(아호 주일재)이 증축하였다.
주일재를 나와서 남쪽 담장을 따라 가면 마을의 중심길이 나온다. 왼쪽으로 가면 양진당이 나온다. 북촌댁은 앞에 보이는 초가집 담장을 따라 가면 나온다.
북촌댁 가는 길.
북촌댁의 솟을대문이다. 대문간이 정면 6칸으로 그 중앙에는 솟을대문이 있다. 오른쪽에 초가로 만든 화장실이 보인다. 북촌댁은 양진당과 함께 하회 마을의 북촌을 대표하는 고택이다. 대문간채, 안채와 사랑채, 별채, 사당채를 갖춘 전형적인 양반집이다. 현재 54칸이 남아있다. 류도성이 1862년에 지은 집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건물이 중간 사랑채인 화경당이다. 화경당의 편액은 한석봉의 글자를 모각하였다. 화경당 왼쪽에 바로 붙어 있는 작은 사랑채는 손자를 위해 만들었다. 정면에 보이는 건물이 큰 사랑채인 북촌유거이다.
남촌댁, 북촌댁, 양진당, 충효당 등 큰 집들은 사랑채를 안채와 측면으로 연결하거나 뒤뜰에 따로 배치하고 있다. 사랑방, 대청, 별당, 서실을 두어 양반들이 모여 문화적 교류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평민의 집들이 가운데 부엌을 두고, 좌우로 사랑방, 안방이 있고 마루가 없는 최소한의 주거 공간만 있었던 것과는 구별된다.
화경당 북쪽으로 쪽마루가 설치된 난간이 있다. 그 옆으로 북쪽 벽을 화방담으로 만들고 기와쪽으로 무늬를 만들어 꽃담을 만들었다. 중앙에 보이는 문은 사당으로 통하는 문이다.
북촌유거. 편액은 김성근의 글씨이다. 북촌댁이라는 이름이 여기에서 나왔다. 집안의 가장 어른이 머물던 사랑채이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상당한 규모의 사랑채이다. 왼쪽 첫째 칸이 부엌과 다락으로 되어 있다. 그 옆 3칸이 온돌방이다. 다음 2칸이 대청이다. 오른쪽 1칸은 내루처럼 만들었다. 팔작지붕, 기둥과 서까래에 한옥의 조형미를 갖춘 대표적 건물이다. 대부분의 목재는 춘양목이라 불리는 금강송으로 지었다. 기둥 밑에서 흰색이 올라오는 것이 보인다. 방충을 위해 소금, 재, 고추가루를 넣은 후 기둥을 올렸다고 한다.
북촌유거 뒷편에 있는 수령 300년 정도의 소나무이다. 휘어진 모습이 하회 마을의 모습과 같다고 해서 하회 소나무라고 불려진다.
북촌댁의 화장실. 본채는 기와로 만든 대저택이나 화장실 지붕은 초가로 만들었다.
하회 마을의 큰 양반집들은 기와집임에도 불구하고 화장실이나 별채, 또는 대문채는 초가로 만든 집들이 있다. 화장실의 경우에 길 밖에서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문을 만든 집도 있다. 자손들에게 물욕을 경계하고, 베푸는 마음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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