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행궁은 평상시에는 수원의 관청으로 사용하다가 왕이 내려오면 행궁으로 사용하였다. 조선시대 행궁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드라마 '대장금' 촬영지로, 일본, 중국등 아시아권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행궁은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머물거나 전란, 휴양, 능원 참배 등으로 지방에 머무를 때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숙소로 이용하던 곳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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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료] 1,500원
[여는 시간] 3월~10월 》09:00~18:00 / 11월~2월 》09:00~17:00
[닫는 날] 월요일
1790년 팔달산 동쪽에 340칸의 행궁을 만들었다가, 화성을 축성하던 시기(1796년)에 장락당, 낙남헌, 외정리소등 대대적인 증축을 하여 봉수당을 중심으로 576칸을 가진 정궁의 모양새를 갖추었다.
일제 침략기에 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낙남헌을 제외하고는 모두 파괴되고, 이 자리에 서양식 병원이 들어섰다. 1996년 화성 축성 200주년을 맞아 역사 바로 세우기 일환으로 복원 사업을 시작하였다. 2003년 10월에 482칸을 복원하여 일반에 공개하였다.
1795년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화성행궁에서 열기 위해 을묘원행을 한다. 건립 당시에 붙여진 건물 이름을 회갑연과 관련한 이름으로 고쳐서 장남헌을 봉수당으로, 행궁의 침전을 어머니의 만수무강을 빌며 장락당이라 이름붙였다.
수원 화성 지도이다. 화성 행궁은 화성 안쪽에 자리잡고 있다.
신풍루. 화성 행궁의 정문이다. 건립 당시에는 진남루였다. 1795년 정조가 신풍루로 고치라고 명하여 편액을 고쳐 썼다. 신풍이란 왕의 새로운 고향이란 뜻으로 한나라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 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화성 행궁 안내도. 화성 행궁은 앞쪽으로 긴 장방형이다. 신풍루에서 좌익문, 중양문, 봉수당은 화성 행궁 배치에 있어서 하나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추천하는 관광 경로를 따라 간다. 1. 신풍루 2. 집사청 3. 북군영 4. 좌익문 5. 중양문 6. 봉수당 7. 경룡관 8. 장락당 9. 유여택 10. 복내당 11. 득중정 12. 낙남헌 13. 노래당 14. 남군영 15. 서리청 16. 비장청.
신풍루로 들어가면 중앙에 좌익문이 보인다. 팔달산 기슭에는 미로한정과 내포사가 보인다.
좌익문 오른쪽에 민속 놀이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진에 보이는 놀이는 투호 놀이 기구이다.
느티나무와 집사청과 북군영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좌익문을 지나면 중양문이 나온다.
중양문을 지나면 봉수당이다. 화성 행궁의 가장 기본이 되는 집이다. 정조가 1795년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연 곳이기도 하다. 이 때 정조는 어머니의 장수를 기원하며 '만년의 장수를 받들어 빈다'는 뜻에서 봉수당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일제 강점기에 봉수당은 자혜의원으로 사용되다가, 후에 봉수당을 헐고 이 자리에 경기 도립 병원을 세웠었다.
봉수당 내부.
봉수당 왼쪽에 있는 경룡관이다. 왕의 침전인 장락당으로 들어가는 누문이다. 장락은 한나라의 궁실의 이름이다. 왕이 능행 때 이곳에서 머문다는 뜻이다. 경룡이란 왕을 상징하는 큰 용이란 뜻이다. 당태종이 거처한 궁궐 이름에서 나온 것으로 조선의 태평성세를 바라는 마음에서 따왔다.
유여택이다. 평상시에는 화성 유수가 거처하였다. 정조는 행차시 이곳에 잠시 머물며 신하를 접견하였다.
유여택과 복내당을 지나서 팔달산 기슭으로 나온다. 벽에 정조의 을묘원행이 그려져 있다.
득중정. 정조가 행차시에 매번 활을 쏘던 곳이다. 이름의 유래는 1790년에 새로 만들어진 이 정자에서 활을 4발 모두 맞히고는 이를 기념하여 득중정이라고 하였다.
낙남헌. 1795년 혜경궁 홍씨 회갑연 기간 중 이곳에서 과거시험과 노인 잔치 등의 행사가 치뤄졌다. 1796년 10월 16일 화성 축성 기념을 행궁의 낙남헌에서 하였다.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과 백성들을 모아 잔치를 벌렸다. 정조는 이때 참여하지 못했다. 궁중에 홍역이 퍼져 9월 22일 정조의 딸인 숙선공주가 홍역에 걸렸다. 정조는 원자가 홍역에 걸릴까봐 이문원으로 함께 피신 갔다. 그래서 축성 기념 행사 참여를 포기하였다.
화성행궁 중 낙남헌이 유일하게 일제 강점기에 헐리지 않았다. 당시 낙남헌을 수원 군청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노래당. 정조가 왕에서 물러나 수원에 머무를 것을 대비해서 만든 건물이다. 주로 낙남헌과 득중정에서 펼쳐지는 행사 도중 휴식을 취하는 곳으로 사용하였다. 노래란 말은 '늙는 것은 운명에 맡기고 편안히 살면 그곳이 고향이다'라는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득중정에서 미로한정으로 올라간다. 가는 길 오른쪽에 내포사가 있다.
미로한정. 미로한정이라는 말은 '장래 늙어서 한가하게 쉴 정자'라는 뜻이다.
미로한정에서 바라본 화성 행궁.
신풍루 좌우에는 군영이 있다. 북군영이다. 북군영는 남군영과는 달리 ㄱ자형 건물이다. 군영은 장용영 외영의 기마병이었던 친군위가 숙직하던 건물이다.
남군영. 장용영 외영은 초기에는 현륭원과 화성 행궁을 지키는 것이 주임무였다. 그러나 화성을 쌓고 화성의 군사적 경제적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수도 남쪽을 방어하는 중심부대가 되었다. 장용영은 정조의 화성 행차시 정조를 호위하고 화성에서 훈련을 지속적으로 실시한 결과 정조의 군사 개혁의 최정예 군대가 되었다.
화령전
득중정 앞에 화령전이 있다. 화령전은 정조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화령전 입구.
전사청. 제사를 관리하는 관리가 집무를 하면서 제사 준비 및 점검을 하는 곳이다.
제정. 제사에 사용될 정화수를 뜨는 우물이다. 현재 제정에서 나오는 물로 연못을 만들어 잉어를 키우고 있다.
화령전의 운한각. 화령전은 1801년 정조의 유언으로 화성 행궁 옆에 세운 정조의 영전이다. 영전은 돌아가신 선왕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살아있을 때와 같이 모시는 곳이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신위를 모신 사당과는 구별된다. 이안청은 정전에 모신 초상화를 옮겨야 할 사정이 생겼을 경우에 초상화를 옮겨 모시는 건물이다.
운한각 안에 있는 정조의 영정.
풍화당. 재실로 제사가 있을 때 제를 올리는 사람이 미리 와서 머무는 건물이다. 풍화는 사회의 풍속과 기강을 교화시킨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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