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은 조선 왕조의 많은 궁궐 중 중심되는 궁궐이다. 북으로는 북악산이 있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 육조거리(세종로)가 있어, 왕도 한양(서울)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대부분의 왕들은 창덕궁을 주된 궁궐로 사용했고, 경복궁은 이궁으로 사용했다. 조선의 5대 궁궐 중에서 광화문, 동십자각, 궁궐 담이 있어 궁을 지키는 궐의 기능을 제대로 갖추고 있다. 광화문 - 흥례문 - 근정문 - 근정전 - 사정전 - 강녕전 - 교태전을 잇는 일직선이 경복궁의 핵심 공간이다. 왕이 공식적으로 신하를 만나는 공간을 외전이라고 하고 근정전이 대표적이다. 왕과 왕비의 사적 공간인 내전에는 강녕전, 교태전이 있다. 웅장한 경회루, 아름다운 아미산 굴뚝과 자경전 꽃담, 십장생 굴뚝이 유명하다.
1395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 때 지었다. 1592년 조왜 7년전쟁으로 불타 없어졌다가 고종 때인 1867년 흥선 대원군이 다시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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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 우리 궁궐 지킴이 | 우리 궁궐 길라잡이 | 수문장 교대의식
[입장료] 3,000원
* 5대궁 연계 통합 관람권 : 1장의 관람권으로 경복궁, 창덕궁(후원 포함), 창경궁, 덕수궁, 종묘 관람. 10,000원. 유효기간 1개월.
[여는 시간 (입장 마감 시간)] 1월~2월 》09:00~17:00 (16:00) / 3월~5월 》09:00~18:00 (17:00) / 6월~8월 》09:00~18:30 (17:30) / 9월~10월 》09:00~18:00 (17:00) / 11월~12월 》09:00~17:00 (16:00)
[닫는 날] 화요일
* 5대 궁궐 휴일 : 월요일(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화요일(경복궁, 종묘)
서울에는 5개의 궁궐이 있다. 왕이 살면서 활동하는 제일의 궁궐을 법궁이라 하고, 화재가 발생한 경우처럼 필요한 경우 옮겨가서 살면서 활동하는 궁궐을 이궁이라고 한다. 경복궁이 법궁일 때는 창덕궁이 이궁이었고, 창덕궁을 법궁으로 사용할 때에는 창경궁을 이궁이라고 불렀다. 조선 대부분의 왕은 창덕궁에서 살았고, 경복궁에는 세종대왕과 몇 명만 살았다. 고종은 덕수궁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크게 보기]
광화문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이다. 3개의 문이 있으며, 경복궁의 다른 문들과 달리 높은 석축 위에 2층으로 되어 있다. 가운데 조금 큰 문은 왕이, 양쪽 문은 신하들이 사용하였다. 2010년 흥례문, 근정전과 일직선이 되도록 위치를 원래대로 복원하였다.
처음에는 오문(午門)이라고 하다가 세종 때에 광화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일본이 조선 총독부를 지으면서 광화문을 철거하려 하였으나 반대 여론에 부닥치자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다. 한국 전쟁 때 포탄 공격을 받아 화강석 축대만 남았었다. 1968년 철근 콘크리트로 다시 지을 때 당시 도로와 주변 건물의 축을 기준으로 하여 본 위치에서 약15m 가량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경복궁은 근정전을 중심으로 4대문을 만들었다. 동쪽 문은 건춘문, 남쪽은 광화문, 서쪽은 영추문, 북쪽은 신무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전통적인 오행설에 따라 각각 봄, 여름, 가을, 겨울과 나무, 불, 쇠, 물을 상징하고 있다. 광화문의 천장에는 남쪽을 지키는 주작이 그려져 있다. 그래서 광화문 앞 길을 주작대로라고도 하였다.
광화문 앞쪽에 한쌍의 해치(해태)상이 있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당시 이세욱이 만든 작품이다. 지금은 광화문 바로 옆에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광화문 앞 80m 떨어진 사헌부(감찰기능) 정문 앞에 있었다고 한다. 사헌부 앞에 있었던 이유는 해치가 옳지 못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 뿔로 받아 버리는 상상 속의 정의로운 동물이었기 때문이다. 1890년대 사진을 보면 해치상 앞에 하마석이 있다. 하마석이란 말에서 내릴때 발을 딛던 돌을 말한다. 왕을 제외하고는 해치상 앞에서 가마나 말에서 내려 광화문으로 걸어가야 했다.
광화문을 지나면 정면에 흥례문이 보인다.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의 공간에는 궁궐을 지키는 군사들을 위한 관청 및 부속 건물들이 있었다.
고종이 재건할 당시 경복궁에는 330여 동의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 섰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때에 흥례문 부근의 궁궐을 헐고 조선총독부가 들어서는 등 훼손이 심하였다. 그 당시 경복궁은 근정전 외 일부 건물만 남았었다.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 사업을 추진하였다.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2001년에는 흥례문, 유화문 행각, 기별청, 영제교를 복원하였다. 2010년 광화문을 복원하였다.
흥례문 앞에서 수문장 교대 의식을 재현한다. 10:00~16:00까지 매시 정각에 한다. 조선시대 수문장은 흥인지문(동대문), 숭례문(남대문), 경복궁 등 왕이 생활하는 궁궐의 대문을 지키는 역활을 하였다. 현재 입고 있는 옷이나 무기나 의장물들은 15세기의 것을 재현하였다. 엄격한 절차에 따라 광화문을 열고 닫았으며 근무 교대를 하였다. 교대 의식의 시작은 북이 울리면 교대를 하기 위해 준비하고, 두번째 북소리에 맞추어 흥례문 앞으로 이동한다. 업무를 인수인계한 다음 세번째 북소리에 교대 절차를 마치고, 퇴장한다.
흥례문에서 입장권 내고 안으로 들어간다. 흥례문으로 들어가면 근정문을 지나 근정전까지 좌우로 행각이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경복궁의 핵심인 근정전을 중심으로 행각을 둘러 큰 마당을 만들고, 근정문 바깥에 또 하나의 외행각을 둘러 마당을 만들었다. 흥례문 앞에 영제교가 있다.
흥례문 안쪽 동쪽에 경복궁 안내실이 있다. 우리말과 외국어(영어, 일본어, 중국어)로 경복궁 무료 해설 안내를 한다. 1시간에서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자세한 내용은 경복궁 홈페이지 참조.
주말에는 자원봉사 단체(우리궁궐지킴이, 우리궁궐길라잡이)에서도 경복궁 무료해설을 하고 있다. 사전 예약을 받고 있다.
영제교.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에는 북악산에서 흘려 내려온 물(금천)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도록 한 어구가 있다. 이 물길은 예전에는 동십자각쪽을 지나 청계천으로 흘러 들어갔다고 한다. 어구의 중앙에 영제교를 만들었다. 노란 동그라미 안은 금천을 지키는 서수이다. 영제교 주위에 4마리가 있다. 서수는 금천을 따라 잡귀들이 땅 위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감시하기 위한 의미로 만들었다.
영제교를 지나 왼쪽을 보면 유화문과 기별청이 있다. 유화문 뒷쪽에는 신하들이 집무를 보는 궐내각사와 빈청이 있었다. 근정문 부근에서 조회, 국문, 교서 반포 등이 이루어졌으므로, 신하들이 쉽게 이곳으로 오갈수 있도록 만든 문이 유화문이다. 기별청은 승정원에서 처리한 일을 기별지에 적어서 알리는 일을 하였다.
근정문의 지붕은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의 4면을 긴 추녀선으로 만들었다. 위 사진의 유화문과 비교하면 지붕 모양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추녀선을 길게 만들기 위해서는 길게 휘어진 나무가 필요하다. 당시 이런 나무들은 구하기가 어려워 우진각 지붕은 경복궁, 창덕궁의 정문, 서울 4대문, 화성의 장안문 같은 중요한 건물에만 사용되었다.
근정문은 근정전의 정문이다. 왼쪽에 무관 전용인 월화문과 오른쪽에 문관 출입문인 일화문이 있다. 가운데 3칸의 문은 왕이 지나 다니는 문이다. 조선시대 궁궐의 정전 정문중 유일하게 2층으로 되어 있다.
근정문 앞 넓은 마당(외행각)은 왕과 신하가 조회를 여는 곳이기도 하였다. 왕은 근정문의 가운데 칸에 어좌를 설치하고 남향으로 앉고, 신하들은 흥례문 부근에서 왕에게 예를 올렸다. 영제교를 중심으로 북쪽에는 정2품 이상이 서고, 남쪽에는 정3품 이하가 섰다. 근정문에서 왕위 즉위식 등 중요한 행사가 치러지기도 했다. 왕이 죽은후 세자가 근정문에서 즉위식을 한 후에 근정전 옥좌에 앉았다. 근정문에서 왕위에 오른 사람은 단종, 성종, 선조가 있다.
근정전
근정문을 들어서면 근정전이다. 근정전은 경복궁의 정전으로 경복궁 내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격식을 갖춘 건물이다. 왕이 신하들의 조회를 받거나 왕의 즉위식 또는 외국 사신접대 등의 큰 행사를 하는데 사용하였다. 근정전의 의미는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잘 다스려진다’라는 뜻이다. 근정문에서 근정전 사이의 중앙길은 주변보다 약간 높게 만들었다. 어도라고 하여 왕만이 다닐 수 있었다. 근정전은 2단의 높은 월대 위에 중층으로 팔작 지붕 형태의 건물이다.
근정전 앞쪽으로 넓은 마당을 조정이라고 한다. 어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일렬로 품계석이 서있다. 품계석이란 신하들이 계급에 따라 정해진 위치에 설 수 있도록 표시한 돌을 말한다. 마당에는 화강암을 얇고 네모나게 다듬은 박석이 깔려 있다. 표면을 일부러 거칠게 마무리하여 햇빛이 반사되어도 눈이 부시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품계석 앞에는 앉지 마세요라는 안내문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람들은 품계석 위에 올라타거나 네모난 돌 위에 앉아서 사진을 촬영을 한다.
근정전 주위를 행각이 둘러싸고 있다. 행각의 주춧돌을 보면 바깥쪽은 둥근 모양, 안쪽은 네모난 모양으로 되어 있다. 원래 안쪽은 칸막이 벽체로 막아 창고로 사용하였다. 일제 시대 때에 전시실로 사용하기 위해 창고를 모두 헐어 지금은 그 모습을 볼 수 없고 네모난 기둥에 칸막이 흔적만 볼 수 있다.
사진촬영포인트. 근정전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북악산, 왼쪽에 인왕산이 자리잡고 있다. 사진을 즐겨 찍는 사람들은 근정전의 2층 처마와 북악산이 평행하게 사선으로 올라가도록 보이는 지점에서 많이 찍는다.
근정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돌로 조각한 짐승들이 있다. 돌난간이 근정전을 동서남북으로 둘러싸고 그 위에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과 각 방위에 맞게 12지신상을 조각하였다. 사진은 근정전 정면으로 남향이다. 제일 위에 주작이 있고, 그 밑에 말과 호랑이가 새겨져 있다. 동물상은 쌍으로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동일한듯 하지만 자세히 다가가면 서로 조금씩 다르다. 하나가 서 있으면 반대편의 동물은 앉아 있고, 서로 바라보는 방향도 다르다. 전통 민화에서 보는 것처럼 웃음과 따뜻함이 묻어나게 전반적으로 온화한 표정들이다.
근정전 올라가는 계단(상월대 답도)에 새겨진 봉황문과 당초문. 봉황은 태평성대일때 나타난다는 상상속의 동물이다. 좋은 왕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새겨 놓았다.
근정전 주위의 드므와 정. 무쇠로 만든 드므는 입이 넓은 큰 그릇이란 뜻의 순우리말이다. 궁궐이 대부분 목조건물이므로 화재 예방을 위한 상징적 의미로 설치하였다. 불의 화신이 화마가 드므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서 도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정은 세 발모양의 향로로 청동으로 만들었다. 근정전에서 의식이 거행될 때 왕이 어좌에 오르면 청동 향로에 향을 피웠다.
2010년 궁궐 유물 실사 과정에서 덕수궁의 정 뚜껑을 찾았다. 대형 향로는 조선시대 법궁인 경복궁 근정전과 대한제국의 법궁인 덕수궁 중화전에 좌우 양쪽에 한 개씩 있었다. 근정전과 중화전의 향로는 모양이나 형식이 서로 비슷하다. 예전 사진에서나 볼 수 있었던 향로 뚜껑을 이번 실사에서 찾은 것이다.
근정전 내부의 어좌. 왕이 앉는 의자 뒤에 펼쳐 놓은 다섯 산봉우리가 그려진 병풍이 있다. 일월오봉병이라고 한다. 해와 달, 다섯 산봉우리, 붉은 소나무, 폭포가 그려져 있다. 이 병풍를 왕권의 상징으로 왕의 초상이 있는 어진 주변이나 왕이 잠시라도 있는 자리에는 펼쳐 놓았다고 한다.
사정전
근정전 뒤로 돌아가면 사정문이 있다. 사정문으로 들어간다.
사정문은 3칸으로 되어 있다. 가운데 칸은 왕이 사용하였으며, 신하들은 좌우의 문을 이용하였다. 사정문 뒤로 사정전 현판이 보인다.
사정전(思政殿)은 왕이 정사를 보던 집무실(편전)이다. 근정전은 화재의 위험성 때문에 중요한 행사때에만 사용하고 보통은 사정전에서 일을 하였다. 편전에서 신하들과 함께 경전을 강론하거나 종친, 신하들에게 주연을 베풀기도 했다. 경복궁의 편전 영역은 사정전을 중심으로 서쪽에 천추전, 동쪽에 만춘전이 있다. 그 주변을 행각이 감싸고 있다. 사정전이란 이름은 정도전이 지은 것으로 왕이 진실로 깊게 생각하여 사리를 분별하여 백성을 굽어 살피도록 한다는 의미이다.
사정전 내부 안내도. 각 건물마다 안내도가 있다.
사정전은 마루로 되어 있다. 두 마리의 용이 구름 속에 있는 운룡도(雲龍圖)가 있다.
사정전 올라가는 계단 오른쪽에 오목 해시계(앙부일구,仰釜日晷)가 있다. 가마솥 모양이다. 안쪽 바닥의 세로선 7줄은 시간을, 가로선 13줄은 동지와 하지를 나타내는 24절기의 계절을 나타낸다.
바늘침이 북극으로 비스듬히 서 있어 계절선에 나타나는 그림자 끝을 보고 24절기를 알 수 있다. 여름에는 안쪽 계절선에, 겨울에는 바깥쪽 계설선에 그림자가 위치한다. 시각선은 묘시부터 유시까지 7개가 있고, 그 사이에 1각(15분)을 뜻하는 8등분선이 있다. 12지신 그림을 그려서 글을 모르는 백성들도 시간을 알게 했다. 세종대에 만들어져 혜정교와 종묘 부근에 설치하였다고 한다.
사정전 오른쪽에 있는 건물은 만춘전(萬春殿)이다. 한국 전쟁때 폭격을 당하여 주춧돌만 남았던 것을 1988년에 복원하였다. 만춘전은 왕이 주로 봄에 머물렀다.
사정전 왼쪽의 건물은 천추전(千秋殿)이다. 사정전의 부속 건물이다. 천추전은 임금이 주로 가을과 겨울에 머물렀다.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과 새로운 기기를 만들때 주로 이용하였다.
만춘전의 아궁이(온돌 시설)와 굴뚝이다. 마루로 되어 있는 사정전은 여름철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추운 겨울날 편전의 기능을 보완하는 의미에서 만춘전과 천추전에 온돌을 설치하였다. 또한 세 건물은 모두 복도로 연결되어 사정전의 기능을 보조하였다. 복도 시설은 일제 강점기에 사라져 지금은 사정전, 만춘전, 춘추전이 각각 독립 건물처럼 보인다.
사정전 뒷쪽으로 가면 왕과 왕비가 일상 생활을 하는 내전으로 들어가는 향오문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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